달럴-엔 환율의 역사(1)
세계 기축통화인 미국 달러와 주요 경제국 일본 엔화의 환율은 국제 정세 및 경제 상황과 맞물려 급변하는 역사를 겪었다.
2차대전 패전 이후인 1949년 4월 브레튼우즈 협정과 물가 안정의 필요성에 따라 일본에도 고정환율제가 도입
당시 고정환율은 달러당 360엔
고정환율제가 외환시장의 수급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이어지자 변동환율제가 세계적 추세로 바뀌었고 일본도 1973년 2월 이를 도입
1985년 9월 '플라자 합의'는 커다란 전환점
달러화 강세로 무역적자가 심해지자 다급해진 미국은 일본과 프랑스, 독일, 영국에 환율 조정을 강하게 요청해 플라자 합의를 이끌어냈다.
결국 당시 달러당 240엔대였던 엔화는 2년여 만인 1988년 120엔대로 두 배 가량 절상
일본은 엔고 연착륙과 경기 부양을 위해 저금리 정책을 펼쳤고 엔화는 일본 증시와 부동산으로 흘러들어가 거품을 일으켰다.
일본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 노력은 별 효과가 없었으며 바로 옆에서는 중국이 수출에 박차를 가하면서 위안화 평가 절하에 나섰다.
엔화 가치는 갈수록 올라 1994년 달러당 엔 환율은 100엔을 돌파
1995년 4월에는 80엔 선까지 깨져 79.75엔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후 '버블 붕괴' 기간 엔화 가치는 계속 하락, '잃어버린 10년' 직후인 2002년 2월 달러당 134엔 까지 떨어졌다.
'플라자 합의' (Plaza Accord)란 1985년 9월 22일 미국 뉴욕에 있는 플라자 호텔에서 G4 경제선진국 (프랑스, 서독, 일본, 미국, 영국) 재무장관, 중앙은행 총재들의 모임에서 발표된 환율에 관한 합의를 가리킨다.
지금은 선진 7개국 모임인 G7 또는 20개국 모임인 G20이 해마다 열려 재무장관들이 수시로 만나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만남이었다.
그 떄 미국은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미국은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1970년대 말부터 강도 높은 통화긴축정책을 시행했다.
시중에 달러화가 줄어들자 달러화 가치가 급등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게다가 미국은 레이건 대통령의 조세감면 정책으로 무역수지 적자 확대와 재정적자를 동시에 견뎌야만 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5개국 재무장관들은 이 회의에서 '협조개입을 통한 달러약세 유도'라는 그 전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비밀 합의를 했다.
이것이 플라자합의의 골자다. 플라자 합의의 결과로 미국 달러화 가치는 떨어지고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 가치는 오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미국을 제외한 4개국은 자국에게 불리한 합의에 왜 동의했을까?
그 이유는 레이건 대통령이 꺼내든 3가지의 압박 카드 때문이었다.
1. 미국이 GATT에서 탈퇴할 수도 있다는 압박
당시 GATT는 무역 규제를 억제하는 전 세계의 유일한 끈이었다. GATT 탈퇴는 곧 보호무역으로의 회귀를 의미.
2. 미국이 달러의 공급량을 무한대로 늘려 부족한 재정을 메우겠다
3. 미국의 적자해소를 위해 소련과의 군비 경쟁을 더 이상 벌이지 않겠다.
→ 일본과 독일 등 무역흑자국은 이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플라자합의 이후 실제로 환율이 크게 변했음.
미국 달러는 가치가 크게 떨어지고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 가치는 폭등했다.
1달러 당 260엔 선을 오르내리던 엔 달러 환율이 플라자 합의 이후 3년동안 46.3%나 절상되었다.
플라자합의 후 엔환느 6주간 달러 대비 14.4% 마르크화는 7.7% 절상되었다.
환율의 급격한 변동은 세계 경제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미국은 달러 약세에 힘입어 수출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엔화 강세로 경기 침체를 우려한 일본 정부가 적극적으로 저금리 정책을 펼쳤고, 이것이 일본의 부동산, 주식 투기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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