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경제

환율의 기초 (5)

dowon 2024. 11. 14. 14:23

환율 변동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 (2)

 

플라자합의 (Plaza Accord)란 1985년 9월 22일 미국 뉴욕에 있는 플라자 호텔에서 G5 경제선진국 (프랑스, 서독일, 일본, 미국, 영국) 재무장관, 중앙은행 총재들의 모임에서 발표된 환율에 관한 합의를 가리킨다.

 

현재는 선진 7개국 모임인 G7 또는 20개국 모임인 G20이 해마다 열려 재무장관들이 수시로 만나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만남이었다. 당시 미국은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미국은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1970년대 말부터 강도 높은 통화긴축정책을 시행했다.

 

시중에 달러화가 줄어들자 달러화 가치가 급등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게다가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의 조세감면 정책으로 무역수지 적자 확대와 재정적자를 동시에 견뎌야 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5개국 재무장관들은 이 회의에서 협조개입을 통한 달러약세 유도라는 그 전까지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비밀 합의를 했다.

 

플라자 합의의 결과로 미국 달러화의 가치는 떨어지고 일본 에화와 독일 마르크화 가치는 오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미국을 제외한 4개국은 자국에게 불리한 합의에 왜 동의했을까? > 레이건 대통령의 3가지 압박 수단 때문)

 

1. 미국이 GATT에서 탈퇴할 수도 있다는 압박

당시 GATT는 무역 규제를 억제하는 전 세계의 유일한 끈이었음. GATT 탈퇴는 곧 보호무역으로의 회귀를 의미함.

2. 미국 달러의 공급량을 무한대로 늘려 부족한 재정을 메우겠다는 압박

3. 미국의 적자해소를 위해 소련과의 군비 경쟁을 더 이상 벌이지 않겠다는 압박

일본과 독일 등 무역흑자국은 이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음. 플라자 합의 이후 실제로 환율이 크게 변동됨.

 

미국 달러는 가치가 크게 떨어지고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 가치는 폭등함.

1달러 당 260엔 선을 오르내리던 엔 달러 환율이 플라자합의 이후 3년 동안 46.3%나 절상됨.

 

미국의 달러 약세 > 미국의 수출 폭발적 증가

엔화 강세 > 경기 침체를 우려한 일본 정부의 적극적 저금리 정책 > 일본의 부동산, 주식 투기

 

일본 중앙은행은 엔화 강세에 따른 수출 부진이 우려되자 1985년 5%이던 정책금리를 1987년까지 2.5%로 인하함. 이것은 일본 역대 최저 수준이었다.

저금리가 이어지자 개인과 기업들은 돈을 빌려 부동산 투자에 열을 올림. 또 엔화가치 상승으로 구매력이 높아지면서 일본 기업들과 국민들은 세계적으로 투자하며 순자본유출이 발생함.

 

eg) 미쓰비시가 록펠러 센터를 구매했고, 일본 국민들은 세계를 여행하며 높아진 구매력으로 소비를 즐김

하지만 일본 정부가 부동산 버블을 우려해 긴축에 나서면서 부동산과 주식의 가치가 폭락함.

일본 정부는 1989년 이후 급격한 금융긴축을 단행하고 1990년 부동산 관련 대출 총량규제를 시행함.

 

이로 인해 1990년 초 거의 4만 선까지 올랐던 낫케이주가는 1992년에는 1만 5,000으로 떨어졌다. 땅값 또한 1989년과 1992년 사이 50% 이상 떨어졌다.

거품이 터진 여파로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으로 불리는 오랜 경기 침체의 늪에 빠지게 됨.


아시아 외환위기는 1997년 동남아시아의 통화 위기가 동북아시아를 거쳐 세계 경제에 영향을 미친 일련의 금융 위기사태를 말한다. 시작은 태국이었다.

 

1997년 태국의 금융 기관에 투자한 외국의 금융 자본이 대규모로 돈을 빼가면서 태국은 금융 위기를 맞았다.

1997년 여름부터는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의 국가들도 금융 위기를 맞았다.

그리고 이 나라에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한 한국도 함께 외환부족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금융위기는 러시아라틴 아메리카까지 튀어 은행 이자가 엄청나게 치솟는 등 위기에 몰렸고, 위기에 몰린 러시아는 이 시기 모라토리엄 (법령에 의해 일정 기간 동안 채무의 이행을 연장시키는 일)을 선언했다.

이어서 브라질도 국제 통화 기금에 구제 금융을 신청했다.

 

1987년부터 1995년까지 거의 10년 가까이 8%대의 성장률을 자랑하던 태국은 1990년대 많은 외국돈을 빌려 썼다.

1997년 초까지 외국 은행들은 700억 달러의 엄청난 액수를 태국에 빌려줬다.

(대부자금 시장에 공급이 증가하면 이자율이 낮아짐)

 

당시 태국 국내 사채시장 이자율이 18%의 고금리였는데 비해 달러 이자율은 7-8%에 불과했고, 엔화 이자는 이보다 낮았다. 태국 은행들은 외국에서 저금리의 돈을 끌어들여 기업들에게 돈을 빌려줬다.

이 돈으로 태국 기업들은 생산성을 올리기보다 고층 빌딩을 짓고, 호화 아파트를 건축했다. 

 

그러다 1996년 말부터 선진국 은행 사이에서 태국이 과연 해외 부채를 갚을 능력이 있는지에 관해 우려 섞인 소리가 나왔다.

1997년 2월 외국 자본이 부분적으로 철수함에 따라 달러 부족에 따른 바트화 하락이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국제 금융 시장에 돌았다.

1997년 5월 미국의 헤지펀드들은 바트화 폭락을 기대하고 본격적으로 바트화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방콕 당국은 낙관적인 경제 전망을 내놓았다.

더군다나 태국 기업의 악성 채무 또한 광범위하게 확산 되고 있었다.

태국의 많은 기업들은 부채 상환을 하지 못해 부채 만기를 연장하거나 또 다른 부채로 전환하는 부채 구조조정에 실패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앙은행인 태국 은행은 1996년 5월 경제성장 전망치를 당초 6.7%에서 5.9%로 하향 조정했고, 태국 정부는 부실 금융기관을 회생시키기 위해 구제금융을 퍼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기업이 채무불이행 상태가 되면 그 회사에 돈을 빌려준 다른 기업도 같은 처지가 되어, 부도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태국은 주력 산업인 섬유와 신발 산업에서 10,000여명의 실업자가 발생했으며, 주가가 1996년 최고치에서 60%나 하락하였다. 일본 엔화 절하가 주가 하락의 가장 큰 요인이었다.

엔화는 1995년 5월 1달러 당 80엔까지 강세를 유지하다 그 후 1년 반만에 120엔대로 50%나 치솟았다. 

태국은 달러 자금을 유치하기 위해 달러에 비트화를 묶는 고정환율제를 채택했기 때문에 엔화 하락의 직접적 피해를 입었다.

 

태국을 비롯한 당시의 동남아시아 지역은 엔화 경제권으로 분류되었다. 값싼 엔화를 무기로 일본 제품은 동남아로 밀려들었고, 일본으로 가는 태국 제품은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일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태국의 수입은 늘고, 수출은 줄어들었다.

그 결과 태국의 무역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태국 경제에서 가장 결정적인 치명타는 헤지펀드의 공격을 방어하느라 외환보유액에서 엄청난 자금을 꺼내 썼다는 점이다.

사실 태국 정부의 보유 외환은 마지막 보류였다. 외국자본은 태국을 빠져 나갈 태세를 보였고, 이를 막기 위해 외환보유액은 바닥이었다.

1997년 6월 27일에 태국 중앙은행은 마침내 자금난에 시달리는 16개 금융기관에 대해 영업정지를 명령하고, 이들 금융기관에 합병 및 구조조정 계획을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1997년 7월 2일 마침내 태국 정부는 외환시장에서 바트화와 달러화를 바꿔 시장을 떠나는 투자자들의 투매를 견디지 못하고 고정환율제 (페그제)를 포기하고 변동환율제를 택했다.

그 여파로 바트화는 일주일 만에 60%이상 폭락뱅크런이 이어졌고, 태국 위기는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를 거쳐 한국까지 전염되었다.